이 세상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YU-NO
에로게 역사상 가장 난해한 게임이라 평가 받는 명작 유노 감상입니다.
개요
옴니버스식 구성의 어드벤쳐 게임들이 주류였던 80년대를 지나 90년대로 넘어오면서 멀티 시나리오 게임이 서서히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폭제가 되었던 게임은 1992년 슈퍼 패미컴으로 발매된 사운드 노벨 제절초(弟切草). 유저 선택에 따라 분기가 발생하고 시나리오를 클리어하면 분기가 계속 늘어나는 독특한 시스템으로 큰 인기를 끌었죠. 이런 분기를 죽 늘어놓으면 플로우챠트 비슷한 모양이 되는데, 복잡하게 구성된 경우 차트를 만들어가며 플레이하던 유저들도 많았습니다. 게임 분기를 분석하는 작업이나 마찬가지여서 번거롭기 그지 없었죠.
멀티 시나리오 붐을 일으켰던 사운드 노벨 제절초
이런 멀티 시나리오 장르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던 1994년경, 시즈웨어에서 게임을 만들던 칸노 히로유키(菅野ひろゆき; 2011년 12월 뇌경색으로 사망)는 위와 같은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시스템 하나를 고안했습니다. 던전 RPG에서 길을 헤메지 않도록 이동했던 곳은 자동으로 표시해주는 오토 맵핑 시스템을 어드벤쳐 게임에 접목시킬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즉, 게임 내에 분기 차트를 내장해 현재 자신이 진행하고 있는 루트를 언제든지 확인할 수 있는 기능을 생각해 낸 것이었습니다. 칸노 히로유키는 이 기능을 자동 분기 매핑 시스템(Auto Diverge Mapping System)이라고 명명했으며, 줄여서 A.D.M.S.라고 불렀습니다.
어드벤쳐 게임 시장의 한 획을 그었던 명 프로듀서 칸노 히로유키
자신의 아이디어에 만족한 칸노는 당시 개발 중인 게임 XENON에 적용해 보려고 했으나 4개월 간의 짧은 제작 기간 동안 이 복잡한 시스템을 구현하기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당시 칸노는 기획, 시나리오, 구성, 프로그래밍 작업을 모두 맡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기획은 빛을 보지 못했으며 칸노 히로유키는 1995년 자신의 대표작 중 하나인 EVE burst error를 발표하고 이듬해 시즈웨어를 떠났습니다. 이 특이한 시스템이 화려하게 꽃을 핀 곳은 당시 업계를 주름잡았던 메이저 제작사 엘프. 대표이사였던 히루타 마사토(蛭田昌人)는 칸노 히로유키를 데려오면서 게임 제작에 대한 전권을 위임했고 상당한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소문으로는 이적 기념으로 포르쉐 한 대를 떡 안겼다고 하는데, 당시 엘프 위상으로 보면 그 정도는 충분한 수준이었습니다.)
자금과 개발 기간에 여유가 생긴 칸노 히로유키는 잠자고 있었던 A.D.M.S.를 다시 꺼냈고 여기에 병렬 세계 이론과 물리학, 수학, 철학, 역사, 종교에 관한 각종 지식을 도를 넘을 정도로 우겨넣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명 애니메이터이자 연출가였던 나가오카 야스치카(長岡康史; 주요 작품으로는 육신합체 갓마즈, 자이언트 로보, 마법기사 레이어스, 신혼합체 고단나)의 미려한 원화가 입혀졌죠. 이 게임이 바로 1996년 12월 26일에 PC-9801로 발매된 이 세상 끝에서 사랑을 노래하는 소녀 YU-NO(この世の果てで恋を唄う少女YU-NO)입니다. 지금까지 에로게 역사상 가장 난해한 설정과 시스템을 가진 어드벤쳐 게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죠.
스토리
'걸어다니는 리비도'라고 불리는 주인공 아리마 타쿠야는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지금은 아버지의 재혼 상대 아유미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유명한 고고학자인 아버지 코다이는 재혼 반년만에 실종되어 지금은 생사가 불분명한 상태였습니다. 이 충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을 무렵 타쿠야는 한 통의 소포를 받게 됩니다. 발신자는 놀랍게도 두 달 전에 실종되었던 아버지. 소포에서 나온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도구와 밤 10시까지 마을 근처에 있는 삼각산으로 나오라는 편지였습니다. 반산반의하던 타쿠야는 삼각산으로 향했고 거기서 뜻밖의 인물을 만나게 되면서 시공을 넘나드는 장대한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캐릭터
아리마 야유미. 주인공의 양어머니로 현재 지오 테크닉스 사에서 근무 중. 켄노미사키 해안 공사 책임자. 허벅지가 드러나는 미니 스커트를 즐겨 입는 젊고 매력적인 여성이라 주인공의 이성을 자주 시험함. 부하 직원인 토요토미 히데오를 매우 신뢰하고 있음.
하타노 칸나. 사카이마치 학원 3학년으로 전학 온 소녀. 차가운 인상으로 누구와도 친해지려 하지 않고 홀로 학교 생활 중. 원조교제를 하고 있다는 안 좋은 소문까지 돌고 있음. 고열로 자주 양호실 신세를 지고 있으며 항상 특수한 목걸이를 착용 중.
이치죠 미츠키. 잠시 사카이마치 학원 교사로 일 한 적이 있으며 본업은 류조지 코조의 비서. 주인공의 전 여친으로 첫경험 상대이기도 함. 주인공을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지만 상황에 따라 대립하기도 함.
아사쿠라 카오리. 지방 방송국 아나운서로 사카이마치 해안 공사 사고에 의문을 품고 지오 테크닉스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열심히 취재하는 중. 공사 책임자인 아유미와 대립할 때가 많음. 주인공의 아버지와도 인연이 있으며 취재 이외의 목적을 가지고 주인공에게 접근 중.
시마즈 미오. 사카이마치 학원 3학년생으로 단정한 용모에 성적까지 우수한 재원. 현 시장의 딸로 전형적인 아가씨지만 본인은 이런 위치를 달가워하지 않음. 엄청난 역사 덕후로 주인공 아버지의 역사 이론에 깊이 심취해 있음. 주인공에게 마음이 있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쌀쌀맞게 대하는 중.
타케다 에리코. 주인공이 다니는 사카이마치 학원의 양호 교사. 오랜 외국 생활로 복장부터 행동까지 상당히 개방적. 주인공의 성희롱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는 대범한 성격. 학교에서도 항상 담배를 물고 다니는 골초로 무슨 이유에서인지 류조지 코조의 뒤를 캐는 중.
YU-NO for PC98
위에서 언급한 스토리는 그야말로 프롤로그 부분을 아주 간단하게 요약한 것입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대사량은 둘째치고라도 모든 캐릭터들의 과거와 현재가 복잡하게 얽혀있어 시나리오를 100% 클리어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하기도 힘들 지경입니다. 보통의 미소녀 게임이라면 캐릭터를 '공략'하는게 목적이기 때문에 루트 몇 개만 타봐도 전체를 이해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지만 유노는 그 공략 목표가 '스토리 자체'이기 때문에 몇몇 캐릭터들과 이러쿵저러쿵 해봤자 궁금증만 더 쌓입니다. 거기에 A.D.M.S. 특유의 고난이도 플레이가 유저들을 골치아프게 만들죠.
유노의 맵 화면입니다. 주인공이 현재 어느 루트를 타고 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분기가 갈리는 지점만 주의하면 쉬울 것 같지만 이 게임은 시간이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는 이론에 기초하고 있어 각각의 루트마다 서로 다른 일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즉, 시간이 몇 개의 레이어처럼 겹쳐 독자적으로 흘러가고 있는 셈이죠. 그리고 시나리오를 100% 클리어 하려면 각 분기에 퍼져있는 다양한 사건을 직접 목격하거나 필요한 아이템을 습득해야 합니다. 초반에 주어지는 리플렉터 디바이스라는 장치가 분기간의 이동을 가능하게 해 주고요. 예를 들어 어떤 루트에서 창고 열쇠가 없어 진행할 할 수 없으면 일단 리플렉터 디바이스를 통해 과거의 특정 지점이나 이미 진행했던 다른 미래도 넘어갑니다. 그리고는 열쇠를 얻어 다시 그 루트를 진행하는 거죠. 보옥이라는 아이템을 사용해 워프를 하는데 숫자 제한이 있어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야 하고, 또 분기가 워낙 많기 때문에 대사 꼼꼼히 읽으면서 진행하려면 현세편만 몇 달은 각오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이세계편은 외길 진행이라 난이도 걱정은 안해도 되는데 여기도 텍스트의 홍수는 매한가지라 이래저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게임입니다. 물론 스토리에 빠지면 그 투자 자체가 엄청난 즐거움이 되겠지요.
Windows판이라고 할 수 있는 엘프 어른의 통조림
PC-9801판은 1997년에만 4만5천장이 팔릴 정도로 히트를 쳤고(당시 에로게 매상 1위 수준은 약 7만장) 유저들의 평가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다른 플랫폼으로의 이식이나 리메이크 요구가 줄을 이었는데 1999년 12월 26일 새턴으로 이식되었고(판매량은 약 24만장) 2000년 12월 22일에 발매된 이벤트 상품 엘프 어른의 통조림(エルフ大人の缶詰)에 단순 Windows 플랫폼 이식판이 수록되었습니다.
YU-NO for SS
새턴판은 보기 괴로울 정도로 구린 시네팩 애니메이션이 혹처럼 달리긴 했지만 16색의 그래픽을 깔끔하게 일신했으며 이름만 대도 아, 그 캐릭터 할 정도로 유명한 성우들이 많이 참여했습니다. 콘솔용이라 에로씬은 어쩔 수 없이 삭제되었지만 노골적인 행위가 아닌 장면들은 그냥 날리지 않고 나름 순화해서 새로 그려넣는 센스를 발휘해 주었습니다.
같은 이벤트 장면을 이렇게 이렇게 바꿨습니다.
더불어 엄청난 성우들이 다수 참여했습니다.
・아리마 타쿠야 - 히야마 노부유키(檜山修之; 용자왕 가오가이거 시시오 가이)
・아리마 아유미 - 이노우에 키쿠코(井上喜久子; 오! 나의 여신님 베르단디)
・시마즈 미오 - 토우마 유미(冬馬由美; 오! 나의 여신님 울드)
・타카다 에리코 - 히사카와 아야(久川綾; 오! 나의 여신님 스쿨드)
・류조지 코죠 - 오오츠카 아키오(大塚明夫; 메탈기어 시리즈 솔리드 스네이크)
YU-NO for PS4
2014년 겨울 코미케(C87)에서 놀라운 소식이 하나 공개되었습니다. 바로 2000년 단순 플랫폼 이식판을 마지막으로 15년 동안 소식이 없었던 유노 '완전' 리메이크 정보! 당시 공개된 주요 스탭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 시쿠라 치요마루(志倉千代丸)
・프로듀서: 아사다 마코토(浅田誠)
・캐릭터 디자인: 나기 료(凪良)
・각본: 칸노 히로유키(菅野ひろゆき)
고인이 된 칸노는 그냥 끼워넣은 것 같고, 주요 스탭은 저렇게 셋입니다. 시쿠라 치요마루는 5pb.랑 MAGES. 대표, 작사/작곡 등 40대 후반(70년생)인데 경력이 꽤 화려하네요. 아사다 마코토는 슈팅 게임 명가 케이브의 핵심 인력이었고, 나기 료는 알 토네리코 시리즈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20년만에 리메이크 되는거 칸노가 직접 다듬어 줬으면 더할나위 없겠지만 이미 고인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죠. 원작의 무게감이 워낙 크고 아직까지 팬들이 많은지라 리메이크 자체가 독이 든 성배를 마시는 수준일텐데, MAGES.에서 용케도 리메이크 결정을 내렸네요. 처음 발매일은 2016년 11월 17일로 잡혔었는데 한 번 연기 후 2017년 3월 16일에 발매되었습니다. 발매 기종은 PS4와 비타이며 비타는 모르겠지만 PS4로 나올 정도의 사양은 아닌데 스펙 낭비하는 느낌이 드네요. (제작사 입장에서는 시장에 많이 풀린 하드를 선택하는게 당연하겠지만)
가장 많이 바뀐 게임 그래픽쪽의 이해를 돕기 위해 원작과 리메이크판의 일부 이벤트 CG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고해상도와 한층 화려해진 색감은 확실히 플랫폼의 발전을 느끼게 해 주었지만 원작과 너무 달라진데다 다소 날림이라는 인상까지 받았던(너무 각지게 그려놨어) 나기 료의 캐릭터 디자인은 역시 정이 안 가네요. 더불어 새턴판 성우진이 워낙 네임드라 그 정도의 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배역을 이해하고 녹음한게 맞나 싶을 정도의 어색한 감정선과 톤이 심심찮게 등장해 열성팬인 주인장의 마음에 스크래치를 남겼습니다. 덕분에 20년 전에 발매된 새턴판이 얼마나 잘 만든 이식판이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orz
그래도 의무감으로 이세계편까지 죽 돌려 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망작을 간신히 모면한 '그럭저럭'인 이식판이었습니다. 그래픽 일신과 더불어 다소 불편했던 원작의 인터페이스를 깔끔하게 손 본 것까지는 좋았는데 위 이미지와 같은 과한 서비스(어딜 찍어야 하는지 알려주는 저 클릭 포인트 때문에 모처럼의 고해상도가 점박이로 변했음. 한두번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매번 봐야 하니, 원.)는 게임 플레이 내내 눈에 거슬렸습니다. 나기 료의 캐릭터 디자인과 더불어 가장 마음에 안 들었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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