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가 이야기 - 호리베 히데로
3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일러스트레이터 호리베 히데로 소개입니다.
우연히 코미케에 출품한 오리지널 단편이 큰 인기를 끌어 프로 작가가 된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12년 동안 게임 잡지 표지를 그린 흔치 않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단 2편의 에로게 원화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후 콘솔용 어드벤쳐 게임으로 방향을 틀어 주목을 받았으며 간간히 동인 게임이나 다른 유명 작가들과의 합동지를 제작하는 등 2000년대 중반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습니다. 2006년 4월에는 개인 화집까지 출간했고 의욕적으로 신작 게임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2006년 6월 17일, 불과 36세의 나이로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인은 급성신부전. 이렇게 거짓말처럼 우리 곁을 떠난 원화가의 이름은 호리베 히데로(堀部秀郎), 엘프의 사쿠 시리즈와 NEC의 인터루드로 어드벤쳐 게임 팬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본좌 대우를 받고 있는 작가입니다.
호리베 히데로는 90년대 초반 당시 인기 만화였던 바스타드와 비슷한 분위기의 판타지 액션물로 코미케에서 두각을 나타낸 동인 작가였습니다. 당시 코미케에 출품했던 오리지널 코믹 이클립스(エクリプス)가 큰 인기를 끌었고 이를 눈여겨 본 하비재팬 편집 담당자의 권유로 만화 잡지 코믹마스터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프로 작가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단행본 1권 분량을 성공적으로 연재한 호리베 히데로는 1993년부터 에로게 전문 잡지 PC Angel 표지를 그리기 시작했고 1995년 중반 건강 때문에 6개월 정도 중단한 것을 제외하고는 2006년 4월까지 무려 12년 동안 고혹적인 느낌의 멋진 일러스트로 팬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무려 12년 동안 PC Angel 표지를 장식했던 호리베 히데로의 멋진 일러스트들
상업용 일러스트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호리베 히데로는 게임 원화일로 눈을 돌렸습니다. 이 때 메이저 제작사 엘프는 러브콜을 했고 게임쪽으론 신인이나 마찬가지인 그에게 큰 프로젝트를 하나 맡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대 히트작 이사쿠(遺作)의 속편이자 엘프의 첫 Windows 오리지널 타이틀 슈사쿠(臭作). 첫 작품이라 부담이 많았을텐데 호리베 히데로는 전작을 그렸던 거물 원화가 요코다 마모루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멋진 캐릭터들을 만들어냈고, 게임 자체도 1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린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러한 인기는 후속작인 키사쿠(鬼作)까지 이어져 호리베 히데로는 사쿠 시리즈 단 2편으로 메이저 원화가 자리에 등극했습니다.
키사쿠를 끝으로 에로게 원화일을 정리한 호리베 히데로는 콘솔 게임으로 진출해 NEC Interchannel과 함께 DC용 오리지널 타이틀 인터루드를 제작합니다. 뛰어난 스토리와 연출, 캐릭터성으로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PS2와 Windows로 이식될만큼 인기를 끌었고 호리베 히데로는 게임 원화뿐만 아니라 세계관 설정, 스토리 기획 등 게임 제작 과정 전반에 참여해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2003년부터는 코미케 때 함께 활동했던 무라카미 토모우(村上智右)가 설립한 Silver Bullet에서 독자적으로 게임을 제작하기 시작했습니다. (공동 창업자라는 얘기도 있던데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 이 회사의 첫 작품인 FRAGMENTS BLUE는 2006년초에 PS2로 발매되었고, 같은 해 3월 雪影 -setsuei-가 뒤를 이었습니다. 호리베 히데로는 FRAGMENTS BLUE에서 캐릭터 디자인과 원화를 모두 담당했고 雪影 -setsuei-에서는 서브 캐릭터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여기에 인터루드의 후속작인 무라기리(斑霧)에 참여했고 중간중간 동인 시절부터 기획했던 게임 리바이어선 개발까지 관여하는 바람에 몸이 많이 망가졌습니다. 건강 악화로 2006년 4월호를 마지막으로 PC Angel 표지 작업을 중단했고 Silver Bullet 관련 프로젝트도 대부분 연기했지만 한 번 상한 몸은 회복되지 않았고, 결국 2개월 후 급성신부전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업 관리에만 조금 신경썼더라면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을 작가였을텐데 참 안타깝네요. NEC Interchannel과 함께 작업했던 무라기리와 Silver Bullet의 리바이어선은 호리베 히데로 사망 직후 작업이 종료되었고 무라기리의 경우 생전에 작업했던 원화 일부만 2007년 1월에 발매된 염가판 인터루드 パンドラBOX에 수록되어 세상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리바이어선은 코미케 때 발매된 설정집이 유일한 유품.
사망 직전 발매된 화집 Yours와 사망 후에 나온 2번째 화집 COLORS
BLACK CAT'S GARAGE라는 개인 서클로 코미케에 종종 참석했습니다.
이제 호리베 히데로가 원화를 담당했던 작품들을 살펴 보겠습니다. 이제 이 목록을 더 이상 업데이트할 수 없다는 사실이 참 안타깝네요.
臭作 - elf, 1998년 3월 27일 발매
호리베 히데로의 에로게 원화 데뷰작이자 엘프가 Windows 시장에 진출한 후 처음으로 내놓은 오리지널 타이틀입니다. 명문 음악 학원 여자 기숙사 관리인으로 위장 취업한 슈사쿠는 자신의 정체가 들키지 전에 기숙사에 있는 여학생들의 약점을 잡아 성노리개로 만들 계획을 세웁니다. 그리고는 갖가지 야비한 수법으로 7명의 여학생을 차례로 유린해 나간다는 것이 게임의 주된 스토리 라인. 게임 설정과 스토리만으로는 영락없는 귀축물이지만 치밀한 도촬 시스템과 적절하게 삽입된 애니메이션 연출, 호리베 히데로의 농염한 원화로 판매량이나 인기도면에서 대박을 친 작품입니다. 특히 에리와의 진엔딩 여운이 장난 아니라 귀축물하다 처음으로 울면서 모니터에 손들 댔다는 사람이 많았다는 후일담이 유명하죠.
2001년 10월 26일에는 시나리오 일부를 추가한 DVD판이 발매되었고 핑크 파인애플이 18금 OVA로도 여러 편 제작했습니다. 애니판은 원작과는 다른 단순 귀축물에다 퀄리티도 별로라고 하니 참고하시길.
鬼作 - elf, 2001년 3월 30일 발매
둘째 형 슈사쿠가 비참하게 죽은 사실은 알게된 이토 가문의 막내 키사쿠는 형들의 무능을 비웃으면서 자신만은 그런 한심한 귀축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그러던 중 한 제약 회사 기숙사 관리직 모집 공고를 보게 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울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해 바로 응시, 면접 당일 선량한 표정 관리(가능했을까?)로 당당히 합격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이토 가문의 마지막 희망 키사쿠의 판타스틱한 직장 생활(...이라고 쓰고 읽기는 드라마틱한 귀축 라이프)을 소재로 한 귀축물입니다.
이토 가문의 막내 키사쿠가 등장하는 사쿠 시리즈의 완결편으로 엘프의 창립 맴버이자 대표였던 히루타 마사토(蛭田昌人)가 사장직을 물러난 다음 처음으로 프로듀싱한 작품입니다. (그만큼 신경을 많이 썼다는 소리지요.) 리프와 키의 순애물이 득세하고 있던 2000년대 초반 순수(?) 귀축물로는 드물게 1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에로게이기 때문에 가능한 주인공 키사쿠의 막장 카리스마와 한층 성숙해진 호리베 히데로의 캐릭터 디자인, 전작 이상으로 잘 짜여진 게임 시스템 덕분에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삼형제 중 가장 잘생긴 키사쿠의 톡톡 튀는 대사 덕분에 웃으면서 플레이했습니다.
2001년 9월 28일에는 DVD판이 발매되었으며 전작과 마찬가지로 핑크 파인애플이 18금 OVA로 제작했습니다. 총집편을 제외하고 총 9편이 제작되었는데 이사쿠와 슈사쿠 때와는 달리 원작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INTERLUDE - NEC Interchannel, 2003년 3월 13일 발매
집 아니면 학교 생활이 일상의 전부인 평범한 학생 아이자와 나오야. 이러한 일상은 신비한 느낌의 소녀 아야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합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사건들, 다른 세계에서 온 것 같은 이형의 괴물...이렇게 뒤틀려 가는 세계의 배후에는 의문의 계획 판도라 프로젝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주인공은 자신이 품은 의문을 풀기 위해 프로젝트에 핵심에 접근하는데...
DC용 오리지널 어드벤쳐 게임으로 이식 전문 NEC Interchannel에서 간만에 내놓은 수작입니다. 치밀한 설정과 흥미 만점의 시나리오, 개성있는 등장 인물과 듣기 좋은 배경 음악, 게임에 몰입하기 좋은 간결한 시스템까지, 전반적인 요소가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이라 좋은 평가를 받았고 판매량도 괜찮아 같은 해 10월 9일에는 PS2로 이식되었고 이듬 해 5월 28일에는 Windows판이 발매되었습니다. 호리베 히데로 그림체의 절정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니 아직 접하지 못한 분들은 한 번 해보세요. 3부작 OVA로도 제작되었는데 스토리를 너무 압축했고 원작의 미려한 캐릭터 디자인을 잘 살리지 못해 팬들에게도 좋은 소리를 못들었다고 합니다.
天に高く地に深く - nuko, 2005년 3월 21일 발매
동인 게임 제작사 nuko의 첫 작품으로 호리베 히데로는 캐릭터 디자인과 패키지 일러스트만 맡았습니다. 캐릭터 디자인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쓴 카와이시 유키히로(川石幸宏)가 원화를 그렸기 때문에 제작 스텝을 확인하지 않으면 호리베 히데로가 참여한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게임은 2019년 일본, 지진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배경으로 우연히 만난 8명의 일상을 그린 비주얼 노블이며 소설가 출신인 nuko의 대표 이시카와 히로유키의 깔끔한 스토리텔링이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FRAGMENTS BLUE - 角川書店, 2006년 1월 19일 발매
호리베 히데로가 운영까지 관여하고 있던 게임 개발사 Silver Bullet의 첫 작품입니다. 원래 Silver Bullet은 동인 작가 시절 호리베 히데로의 파트너였던 무라카미 토모우가 자신이 기획했던 시나리오 리바이어선을 구체화하기 위해 설립했던 회사였는데 여러 가지 사정으로 리바이어선 프로젝트가 지지부진하게 되자 角川書店의 지원을 받아 이 게임 FRAGMENTS BLUE를 먼저 제작했습니다. Silver Bullet에서 게임을 개발하고 角川書店이 제작 지원과 유통쪽을 맡은 거죠.
PS2용 오리지널 타이틀인 이 작품은 발신인이 없는 의문의 편지를 받고 주인공이 2년전에 죽은 소꼽 친구의 기억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겪게 되는 여러가지 사건을 다룬 어드벤쳐 게임입니다. 짜임새 있는 스토리는 수준급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혼이 실린 호리베 히데로의 빛나는 캐릭터 디자인과 원화는 멋지다! 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준이었습니다. 원화가의 실직적인 유작이라 더 기억에 남네요. (마지막 작품은 무라기리라고 할 수 있지만 이건 개발이 중지된 물건이라 세상에 빛을 본 FRAGMENTS BLUE를 유작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네요.)
雪影 -setsuei- - Silver Bullet, 2006년 3월 24일 발매
Silver Bullet의 두 번째 작품인데 메인 캐릭터 디자인과 원화는 프리 일러스트레이터 무츠키 호타루(むつきほたる)가 맡고 호리베 히데로는 서브 캐릭터 일부 원화를 담당했습니다. FRAGMENTS BLUE 개발 도중 틈틈히 작업한 것 같은데 이런 식의 중복 작업이 원화가의 건강을 많이 해쳤을거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네요. 호리베 히데로 외에도 타나카 로미오(田中ロミオ)가 스토리 기획에 참여해 화제가 된 작품인데 전체적인 평가는 별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작품 외에도 nuko의 彼岸ノ此岸 캐릭터 디자인 감수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만 개발에 직접 참여한 것이 아니라 제외했습니다. 이제는 그 성숙한 그림체를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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